
컴퓨터 사업을 하던 시절, 메모리 가격이 요동칠 때마다 제 마진이 직격탄을 맞았습니다.
그때 '이 RAM 가격이 곧 주가구나' 하고 연결해서 생각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미국은 한국 반도체를 압박하고, 중국 창신 메모리 테크놀로지(CXMT)는 상하이 증시에 화려하게 입성했으며
엔비디아는 네이버의 3대 주주가 됐습니다.
하루 사이에 터진 이 세 가지 뉴스를 보면서, 한국 반도체가 지금 얼마나 복잡한 십자로에 서 있는지 다시 실감했습니다.
40년 전 일본이 겪은 일, 지금 우리 이야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한국 반도체는 너무 강해서 미국도 함부로 못 건드린다"고 알려져 있지만,
제 경험상 이건 좀 순진한 생각입니다.
1980년대 일본 반도체 기업들도 똑같은 말을 들었을 겁니다.
당시 일본의 NEC, 도시바, 후지쯔는 세계 메모리 시장의 80%를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기술력과 낮은 원가를 앞세워 미국 기업들을 밀어냈죠.
그런데 1985년 플라자 합의(Plaza Accord)가 터졌습니다.
여기서 플라자 합의란 미국·일본·독일·프랑스·영국이 달러 약세를 유도하기 위해 체결한 환율 조정 협정으로,
이 조치 하나로 엔화 가치가 급등해 일본산 제품의 수출 경쟁력이 한순간에 꺾였습니다.
1년 뒤인 1986년에는 미일 반도체 협정이 체결되면서 일본산 D램에 최저 가격 규제가 적용됐고,
일본 시장에서 미국산 반도체의 점유율을 20%까지 강제로 끌어올리는 조항까지 들어갔습니다.
제조 역량 키우는 데만 집중하다가 통상 압박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결과였습니다.
그 빈자리를 삼성전자 같은 한국 기업들이 비집고 들어가 지금의 위치를 만들었습니다.
지금 미국 무역대표부(USTR)의 그리어 대표는 "무역 수지 적자를 줄이기 위해 관세를 포함한 모든 수단을 쓰겠다"고 했고,
상무부 러트닉 장관은 삼성전자·SK하이닉스의 미국 공장 건립을 공개적으로 요구했습니다.
SK그룹 최태원 회장조차 "지금 메모리 가격은 비정상적으로 높다.
40년 전 일본과 똑같은 상황이 올 수 있다"고 경고했을 정도입니다(출처: USTR 공식 홈페이지).
물론 반론도 있습니다. 지금은 1980년대가 아니라는 거죠.
한국 메모리에 관세를 부과하면 그 비용은 결국 미국의 애플,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같은 빅테크가 떠안게 됩니다.
한국을 억누를수록 중국 기업들이 반사이익을 얻는 구조이기도 하고요.
그래도 저는 낙관하기가 어렵습니다.
트럼프 행정부는 단기 국익을 위해서라면 상당히 무리한 카드도 꺼내 드는 정부라는 걸 지난 몇 년간 충분히 봐왔기 때문입니다.
- 1985년 플라자 합의로 엔화 가치 급등 → 일본 수출 경쟁력 붕괴
- 1986년 미일 반도체 협정으로 D램 최저 가격 규제 적용
- 현재 USTR·상무부가 한국 반도체 기업에 미국 투자 압박 중
- 미국 싱크탱크 CSIS, "수출 강국에서 생태계 강국으로 진화해야 한다" 권고
CXMT 중국 시총 1위 등극, 그런데 저는 좀 다르게 봅니다
중국 창신 메모리 테크놀로지(CXMT)가 상하이 증권거래소 과창판에 상장하자마자
공모가 대비 465% 급등하며 시가총액 약 711조 원을 기록했습니다.
중국 공상은행을 가볍게 제치고 중국 본토 시총 1위에 올랐습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중국 반도체는 EUV 장비도 없어서 기술력이 한참 뒤진다"고 알려져 있지만, 제 경험상 시장은 기술력만으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CXMT의 범용 D램 시장 점유율은 1년 새 3%에서 8%로 껑충 뛰었습니다.
고대역폭 메모리(HBM)처럼 고난도 제품은 못 만들어도,
AI 서버 수요 폭증으로 범용 D램까지 공급이 달리는 상황에서 CXMT는 착실히 자리를 넓혀갔습니다.
여기서 HBM이란 여러 장의 D램 칩을 수직으로 쌓아 초고속·대용량 데이터 처리가 가능하게 만든 메모리로,
엔비디아 GPU에 탑재되는 핵심 부품입니다. 삼성전자·SK하이닉스만 양산할 수 있는 고난도 제품이죠.
시각은 극명하게 갈립니다. 노무라 증권은 CXMT에 매수 의견을 내고 목표 주가를 현재의 두 배 이상으로 제시했습니다.
반면 모닝스타는 EUV 장비 확보 불가 및 경쟁사 대비 낮은 가격 구조를 근거로 적정 주가가 현재의 30%에도 못 미친다고 봤습니다(출처: Morningstar).
참고할 사례가 있습니다. 중국 파운드리 기업 SMIC는 2020년 과창판 상장 직후 주가가 202% 폭등했지만, 몇 달 뒤 미국 상무부 수출 통제 대상에 오르면서 첨단 공정 진입이 막혔습니다.
CXMT도 같은 리스크를 안고 있습니다.
이번 상장으로 조달한 약 15조 원의 자금을 생산 설비 확대와
HBM 개발에 투입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은 분명 경계해야 할 대목입니다.
범용 D램에서만큼은 이제 우리 기업들의 독주를 장담하기 어려운 국면이 됐습니다.
네이버·엔비디아 동맹, 기회인가 종속인가
네이버가 엔비디아를 대상으로 약 1조 5,000억 원 규모의 제3자 배정 유상증자를 단행했습니다.
이렇게 되면 엔비디아는 네이버 지분 4.5%를 확보해 국민연금, 블랙록에 이은 3대 주주가 됩니다.
22년 만에 처음 있는 제3자 배정 유상증자라는 점에서 시장이 주목했고, 어제 네이버 주가는 8.6% 급등했습니다.
두 회사가 함께 추진하는 것은 AI 팩토리(AI Factory) 사업입니다.
여기서 AI 팩토리란 GPU 등 컴퓨팅 자원을 활용해 AI 모델을 구동하고
토큰을 대량 생산해 기업이나 기관에 판매하는 일종의 '지능 제조 공장'입니다.
기존 데이터센터가 서버 공간을 임대해주는 수준이었다면, AI 팩토리는 공장처럼 AI 연산 결과물을 찍어내는 개념입니다.
네이버는 내년 상반기 세종시에서 55MW 규모의 AI 팩토리를 가동하고, 장기적으로 1GW까지 확대한다는 계획입니다.
자산운용사 브루크필드도 최대 90억 달러 지원 합의를 맺으면서 자금 조달 구조도 어느 정도 갖춰졌습니다.
일반적으로 이런 협력을 '윈-윈'으로 보는 시각이 많지만, 저는 좀 다르게 봅니다.
AI 팩토리를 구축할수록 GPU뿐 아니라 소프트웨어 스택까지 엔비디아 의존도가 높아지는 구조입니다.
엔비디아가 자금을 투입해 자사 GPU 수요를 창출하는 이른바 벤더 파이낸싱(Vendor Financing)의 한국판이라는 비판도 나오는 이유입니다.
네이버가 이 협력을 얼마나 내재화해 자체 역량으로 전환하느냐가 결국 이 투자의 성패를 가를 것으로 보입니다.
저는 네이버 주식을 사지 않았습니다. 다들 오를 때 혼자 지지부진하던 주식이라 손이 안 갔는데,
이번 뉴스를 보니 그 판단이 아쉬워지기도 합니다. 컴퓨터 사업할 때 메모리 가격 보면서 주식을 떠올리지 못했던 것처럼,
이번에도 한 발 늦은 느낌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미국이 정말 한국 반도체에 관세를 부과할 수 있나요?
A. 가능성이 없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다만 일반적으로 "미국이 한국 메모리에 손댔다가는 미국 빅테크 비용이 오른다"고 알려져 있는데,
실제로 트럼프 행정부는 단기 국익을 위해 그 비용을 감수하는 결정을 여러 차례 내린 바 있습니다.
완전히 배제하기 어려운 시나리오입니다.
Q. CXMT가 HBM을 만들 수 있게 되면 삼성·하이닉스는 위험한가요?
A. 단기적으로는 쉽지 않습니다.
HBM 생산에는 EUV 노광 장비가 사실상 필수인데, CXMT는 이 장비를 확보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다만 이번 상장으로 확보한 15조 원을 HBM 개발에 투입할 경우, 3~5년 후 시나리오는 지금과 달라질 수 있습니다.
마냥 안심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Q. 네이버와 엔비디아 협력이 기존 네이버 주주에게는 손해 아닌가요?
A. 제3자 배정 유상증자로 신주가 발행되면 기존 주주 지분이 희석됩니다.
이를 감안해 네이버는 동시에 1조 원 규모의 자사주 매입·소각을 공시했습니다.
희석 효과를 어느 정도 상쇄하려는 조치이지만, 장기적으로 AI 팩토리 사업의 수익성이 입증돼야 진짜 의미가 있습니다.
Q. 지금 반도체 주식을 사도 될까요?
A. 제가 직접 판단을 내려드리기는 어렵고, 저는 메모리 업황 자체는 나쁘지 않다고 봅니다.
다만 미국 통상 압박, 중국 추격, 단일 종목 레버리지 거래 제한 강화 등 변동성 요인이 여럿 겹쳐 있는 구간입니다.
당장 필요한 돈보다는 여유 자금으로, 분할 매수 방식이 이 구간에서는 더 합리적으로 보입니다.
결론
컴퓨터 사업을 하면서 메모리 가격에 실시간으로 발등을 찍혔던 저는, 이 시장이 얼마나 빠르게 움직이는지 몸으로 압니다.
40년 전 일본이 제조 강국의 자리에서 미국의 표적이 됐듯, 지금 한국 반도체도 그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CXMT의 부상은 범용 D램 시장에서의 독주가 끝날 수 있다는 신호이고, 미국의 압박은 현실로 진행 중입니다.
그나마 희망적인 지점은 네이버·엔비디아 협력처럼 단순 제조가 아닌 생태계 참여자로서의 움직임이 나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미국 싱크탱크 CSIS가 보고서에서 지적했듯, 수출 강국에서 생태계 강국으로 전환하는 것이
지금 한국 기업들에게 필요한 방향입니다. 저는 앞으로도 이 흐름을 계속 추적할 생각입니다.